안동임씨유래

안동임씨유래

◎ 씨족(氏族)의 연원(淵源)

안동임씨 시조는 임동방(林彤芳)이다. 신라국초 박혁거세조(朴赫居世朝)에 20명의 개국공신 중 한 분으로 금동군(錦東君) 국자대의(國子大宜)를 역임하시다.

이 기록은 우리 세보(世譜)에 생 졸 일(生 卒 日)과 묘지가 명백히 기재되었고 그 증빙물(徵憑物)로는 명위보(明衛譜)와 거장보(擧章譜)가 있어 더욱 실증을 하고 있다.

시조에서 13世까지는 경주에서 세거하시다, 14世 영 조(欞 祖) 이후는 안동(安東)에서 살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본관(本貫)을 안동으로 정한 것은 50世 주흥(朱興) 조께서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몽고의 침공을 받아 호골장군(虎骨將軍)으로 이를 격파하고 강화에서 송도로 돌아오니 그 공으로 안동군(安東君)을 봉작 받았고 52世 세(世) 조께서 충혜왕(忠惠王)조에 대기장군(大箕將軍)으로 마적과 싸워 죽음을 당하니 충목왕(忠穆王) 2년에 복성군(福城君) 및 판도판서(判圖判書)로 추봉 받음으로서 관향(貫鄕)을 안동(安東)으로 한 것이다.

 

◎ 본관(本貫) 및 연혁(沿革)

안동부(安東府)는 경상북도에 위치하고 있으나 본래 신라 고야타군(古陁耶郡) 인데 경덕왕(景德王) 때에 고창군(古昌郡)으로 고쳤고 고려태조 때 군(郡)을 부(府)로 승격 안동(安東)이라 고치고 후에 영가군(永嘉郡)으로 바뀌었다. 성종(成宗) 때 길주(吉州)로 고쳐 자사(勅史)를 두었으며, 후에 또다시 안동부(安東府)로 고쳐졌다. 명종(明宗) 때 도호부(都護府)로 충열왕(忠烈王) 때 복주목(福州牧)으로 고치고 공민왕(恭愍王) 때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임하. 풍산. 일직. 감천. 길안. 내성. 춘양. 재산이 이에 속하고 현대에 와서 안동군(安東郡), 안동시(安東市)로 개칭(改稱) 되었다.

 

◎ 파명록(派名錄)

개성(開城) = 사직공파(司直公派)-(운영雲永- 가稼)

청송(靑松) = 진사공파(進士公派_-(운전雲專- 도稻)

 

◎ 중요 세거지(重要 世居地)

시조 동방(彤芳) 조(祖)에서 13世 까지는 경주(慶州)에 세거하시다, 14世 영(欞) 조부터 안동(安東)에서 사시다 고려조에 선조님 들이 관직에 진출함으로 송도(松都:開城)로 많이 이주하시고, 지금은 전국에 살고 있으나 많이 살고 있는 곳은 북한의 개성(開城). 서울. 경기. 경북 (安東.靑松.盈德). 대구. 부산지방이고, 88年度 세보서문(世譜序文)에 의하면 양산(梁山). 金化(금화) 교전리(橋田里) 금곡(金谷)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남북통일이 되면 북에 있는 종친들을 찾게 되어 안동임씨(安東林氏)의 수가 많아 질 것입니다.

 

◎ 씨족사(氏族史)의 개요(槪要)

우리 시조는 신라초기 박혁거세조의 개국공신 국자대의공(國子大宜公 ) 임동방(林彤芳) 조(祖)이시다.

임진보(壬辰譜)에는 시조를 복성군(福城君) 세자조(世字祖)로 모셨으나 정미보(丁未譜)에서는 시조를 신라국초 개국공신인 임동방(林彤芳 ) 공을 모시게 된 연유는 해서지방(海西地方)에서 명위보(明衛譜)란 책을 발견했는데 그 명위보에는 임동방(林彤芳) 공이 우리 임씨(林氏)의 시조임과 복성군(福城君)이 안동임문(安東林門)의 중조(中祖)임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정축보(丁丑譜)에서도 시조를 정미보와 동일하게 한 것은 명위보를 감수한 분이 조선조 명종 인조(明宗 仁祖) 때 한학의 대가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이고, 거장보(擧章譜)에서도 명위보(明衛譜)와 같이 임동방(林彤芳) 공이 기록되어 있고 우리는 2 천 수백 년을 이 땅에 살아왔기 때문에 선조님 들은 안동임(安東林)을 토임(土林)이라 일러 왔다.

 

우리의 본관을 안동(安東)으로 한 것은 주흥(朱興) 조께서 안동군(安東君)을 세 자(世 字) 조께서 복성군(福城君)으로 봉작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안동 길안 등지에 집촌(集村)으로 살아온 일부 족친들은 그 지명을 따서 길안임씨(吉安林氏)로 호적에 등재된 사례가 있으나 이는 모두 안동(安東)과 동일 임씨(林氏)인 것이다. 각종 성씨에 관한 책에는 임 박(林 樸)이 길안임씨의 시조로 오기된 것도 허다하나 안동임씨(安東林氏譜)의 55世가 확실하다.

 

고려 공민왕 조에 중서사인(中書舍人). 대사성(大司成). 성균관좨주(成均祭酒). 좌대언(左代言). 제주선무사(濟州宣撫使)등을 역임하신 임박(林 樸) 조는 우왕(禑王) 원년(1375年)에 이임인(李仁任)이 발기하여 북원(北元)과 국교를 맺고 글을 북원에 보내려고 하였는데 임 박(林 樸) 좌대언(左代言, 正3品)은 박상충(朴尙衷). 정도전(鄭道傳)등과 더불어 이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사헌 이보림(李寶林)이 이인임에게 아부하여 탄핵한 결과 벼슬을 때고 평민으로 만들어 고향인 길안현(吉安縣)으로 유형(流刑)을 보냈다. 그 후 임 박(林 樸)은 우왕(禑王)을 맞으려 한다는 모함을 받아 전법사(典法司)에서 장(杖) 100대를 맞고 무안(務安)으로 장류(杖流)되어 가던 도중에 형리(刑吏)에게 밟혀 별세하였다.

(高麗史 列傳 제46 및 林 樸 傳에서)

 

 

위와 같이 임 박((林 樸)의 서거로 우리 임문(林門)은 몰락되고 벼슬길에도 오르지 못하여 자손들이 침체되고 일부 족친들은 다른 관(貫) 林氏로 이관본(移貫本)하고 개성(開城) 개풍(開豊)등지에 집촌으로 살던 일가들을 찾지 못하여 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신라와 고려 때는 많은 명사(名士)를 배출했으나 조선조에는 뚜렷한 인물이 없었다.

2020년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종친은 약 7,500名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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